혼자 살면 무슨 재민겨?

우리를 설레이게 하는 것들

파라오배 2011. 11. 16. 13:14

아침에 큰 딸아이 등교시켜 주면서 물었다.

" 너, 지금 공부하면서 대학가서 생활하는 것 생각하면 설레이냐?"

"응, 설레이지."

"그래, 그런 설렘이 있어야 사는거다. 학교가면 무슨 일이 있을까? 이번 시험에 성적이 얼마나 나올까? 주말에 옷 사러 가야지. 그런 설렘이 있어야 사는거지"

내가 말하고자 한 뜻이 전달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설렘이 있다는 말에 나도 설레었다.

 

그 동안 갖고 싶었던 책, 김훈의 [자전거 여행 1, 2]가 어제 왔다.

절판이 되어 구하지 못하던 것을 중고구입 신청을 해 두었었는데 마침내 책이 왔다.

비닐봉투에 넣고 신문지로 싸고 다시 골판지로 포장을 해 놓은 것이 보내준 사람의 마음을 전해준다.

 

늦은 밤, 문득 커피 생각이 나 한 잔을 내렸다.

원두를 갈고, 드립퍼로 커피잔 딱 한 잔 정도를 내려 마셨는데, 맛이 환상적이다.

맛을 본 아내나 큰 딸아이도 놀란 반응이다.

여러 차례 시도한 끝에 이제야 '감'이 오는 것인가?

 

술 취한 기분에 음향기기도 함께 파는 커피점에서 턴테이블을 구입했다.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던 LP판을 다시 듣고 싶어서다.

집에 있는 작은 오디오에 연결해도, 홈시어터에 연결해도 되지 않아 앰프도 하나 구입했다.

오늘 도착한다.

커피를 내려 음악을 들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설렌다.

사는 맛이다.

 

 

고은 시인의 작은 시집 [순간의 꽃]에 나오는 짧은 시들입니다.

박웅현의 말처럼 한 문장 한 문장을 꼭꼭 눌러 읽으면 마음에 잔물결이 일어납니다.

 

**

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버렸다

 

비로소 넓은 물을 돌아보았다

 

**

4월 30일

저 수운산 연둣빛 좀 보아라

 

이런 날

무슨 사랑이겠는가

무슨 미움이겠는가

 

**

옷깃 여며라

광주 이천 불구덩이 가마 속

그릇 하나 익어간다

 

**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

봄바람에

이 골짝

저 골짝

난리 났네

제정신 못 차리겠네

아유 꽃년 꽃놈들!

 

**

저쪽 언덕에서

소가  비 맞고 있다

 

이쪽 처마 밑에서

나는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다

 

둘은 한참 뒤 서로 눈길을 피하였다

 

**

아무래도 미워하는 힘 이상으로

사랑하는 힘이 있어야겠다

이 세상과

저 세상에는

사람 살 만한 아침이 있다 저녁이 있다 밤이 있다

 

호젓이 불 밝혀

 

**

책을 미워한다

책 읽는 놈들을 미워한다

이런 놈들로

정신이 죽어버렸다

 

밥그릇들 포개어진 식당같이 빈 돼지우리같이

 

**

새벽 먼동 뭉수레하다

옥저땅 바닷가 자개돌들이 자고 있다

긴 꿈결인가

해 뜨는 줄도 모르겠다

 

**

만물은 노래하고 말한다

새는 새소리로 노래하고

바위는 침묵으로 말한다

나는 무엇으로 노래하고 무엇으로 말하는가

나의 가갸거겨고교는 무슨 잠꼬대인가

 

판화가 이철수의 30년 작품집 [나무에 새긴 마음]에 있는 작품 중에서

마음에 남는 것 몇 개를 골라봤습니다.

[마른 풀의 노래]나 [산벚나무, 꽃피었네] 판화집은 절판되어 나오지 않고,

이 작품집에 거의 모든 작품을 다 수록했다고 합니다.

책 값이 비싸네요. 가까이 있는 분 중에 가지고 계신 분이 있어 잠시 빌려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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